만드는 비용이 거의 0이 되고 있다. 글, 영상, 코드, 디자인. AI가 많이 만들고 있다. 작년에 비해 같은 일에 들이는 시간이 확실히 짧아졌다. 한 줄만 적으면 에이전트가 코드베이스 읽고, 테스트 돌리고, 포스팅 올린다. 리서치 시키면 사이트 수십 개 읽고 표 만들고 차트까지 그려서 보고서로 묶어준다. 이 속도는 앞으로 더 빨라질 것 같다.

만드는 게 쉬워지면 만들어지는 양이 폭발한다. 그런데 사람이 하루에 볼 수 있는 시간은 똑같다. 그러니까 만들어진 것 자체에는 점점 값이 안 붙는 것 같다.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건 누구도 안 본다.

그러면 값은 어디로 가나. 그걸 골라주는 자리로 가는 것 같다.

같은 시나리오가 A24 라벨을 달고 나오느냐 작은 인디 배급사로 나오느냐로 평단의 시선이 다르다. 같은 빵집이 매거진 한 권에 다뤄지느냐 아니냐로 매장 앞에 줄이 다르게 선다. 누가 먹어주느냐 입어주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소비가 결정된다. 만든 사람이 아니라 골라준 사람이 값을 정한다.

갤러리스트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누구의 그림을 자기 벽에 거느냐가 중요하다. 누구 그림을 가져올 수 있느냐가 그 갤러리의 평판이다. 출판사도 마찬가지다. 누구 작가 책을 가져올 수 있느냐가 전부다. 책을 '만드는' 비용은 이미 충분히 저렴해졌고, 앞으로 더 떨어진다. 그러면 어떤 작가와 전속계약을 맺느냐가 출판사의 평판과 비즈니스를 만든다. 만드는 값이 낮아질수록 골라주는 게 희소해진다. 거기 가치가 생긴다.

AI는 그 패턴을 모든 산업으로 가져가는 중인 것 같다. 패션도, 음식도, 교육도, 금융도, 소프트웨어도. 만드는 쪽은 인프라 거인 몇 곳이 다 가져간다.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러면 남는 건 골라주는 쪽이다.

골라주는 힘은 세 가지로 쌓이는 것 같다.

첫째, 누가 소비하느냐. 에르메스 가방의 값은 가죽 값으로 매겨지지 않는다. 그걸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명단으로 매겨진다. Erewhon 매대에 올라간 콤부차의 값은 콤부차 값이 아니다. Erewhon에서 그걸 사는 사람의 값이다. AI가 만들어낸 게 무한해질수록, 누가 그걸 골라 쓰느냐가 거의 유일하게 남는 신호 같다. 앤디 워홀이 일찍 본 셈이다.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유명하다는 그 사실만으로 좋아한다고. 만드는 게 공짜가 되는 세상에선 이게 농담이 아니라 시장 원리가 되는 것 같다.

둘째, 어떤 커뮤니티가 있느냐. 예전부터 트라이브(tribe)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앞으로는 그게 더 중요해질 것 같다. 개개인의 능력이 컴퓨터에 비해 미미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그냥 우리끼리 모여 있는 게 가장 중요해진다. 무엇을 만들 수 있느냐로 차이가 안 나니까, 누구와 같이 있느냐가 차이가 된다. 그러면 그 안에 들어가는 값이 제일 비싸진다. 미디어 비즈니스, 커뮤니티 비즈니스.

셋째, 서로 어떤 평판을 만들어주느냐. 같은 신인이 어느 기획사에 들어가느냐로 데뷔의 무게가 다르다. 같은 작가가 어느 갤러리에 걸리느냐로 다음 그림 값이 다르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의 평판을 만들어준다. 갤러리가 작가를 띄우고, 작가가 갤러리를 띄운다. 한쪽 방향이 아니라 서로 묶여서 값이 오른다. 추천하는 사람이 곧 인증서다.

좀 무서운 건, 만드는 실력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길이 좁아진다는 점이다. 작년까진 글 잘 쓰면 작가, 영상 잘 찍으면 감독, 코드 잘 짜면 엔지니어였다. 이제 그 일을 에이전트가 한다. 한 줄 명령으로 백 명 몫의 결과물이 나온다. 결과물로는 차이가 안 나니까, 어디에 속해 있느냐, 누구와 묶여 있느냐가 자기를 증명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 되는 것 같다.

투자자 입장에선 분류가 단순해지기도 한다. 만드는 회사냐, 골라주는 회사냐. 만드는 쪽은 인프라 거인 몇 곳으로 빨려 들어가서 자리가 없다. 반면 골라주는 쪽은 세대마다, 취향마다, 지역마다, 언어마다 한 자리씩 비어 있다. 누가 모여 있고, 그들이 무엇을 입고 먹고 읽느냐. 그 안에 들어가는 값이 곧 비즈니스다. 만드는 건 결국 소수가 다 할 테고, 그걸 어떻게 잘 유통하는 몇몇 브랜드가 그 위에서 뜨지 않을까.

Soho House가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클래스의 한 자리를 가져간 것처럼, A24가 영화 취향의 한 자리를 가져간 것처럼, Hodinkee가 시계 애호가의 한 자리를 가져간 것처럼, 아직 안 잡힌 자리가 산업마다 세대마다 줄지어 있다. 한 자리씩이지만 한 번 잡으면 잘 안 흔들린다. 신뢰는 자본보다 천천히 쌓이고 천천히 무너진다. GPU는 돈으로 살 수 있어도, 안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돈으로 못 산다.

어디에 베팅해야 할까. 답은 아직 또렷하지 않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다. 누구 옆에 누가 모여 있느냐가 중요할 것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