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영화에는 빌런이 있다. 《베테랑》엔 재벌 3세 조태오가 있었고, 《서울의 봄》엔 전두광이 있었다. 우리는 그 두 시간 동안 빌런이 혼나기를 기다린다.
히어로물도 똑같다. 캡틴 아메리카의 첫 번째 적은 히틀러였다. 배트맨의 주적은 마피아 '알 카포네', 아이언맨의 적은 '소련의 과학 기술'이었다. 그 시기에 맞는 빌런이 있고 히어로물은 그 빌런을 구체화해서 대중들 대신 때려준다.
그런데 요즘은 때릴 빌런이 안 보인다. 다들 화는 났는데 누굴 패야 할지를 모른다. 우리를 괴롭히는 건 비교를 부추기는 알고리즘, 주의를 빼가는 피드, 뭘 해도 안 바뀐다는 무력감이다. 다 얼굴이 없다. 피드에 주먹을 날릴 수는 없다. 빌런이 사라진 게 아니라 얼굴을 숨긴 것이다.
영화 《모범택시》는 "법이 죽었으니 내가 법이 된다"며 시스템 밖으로 나갔다. 《기생충》은 시스템 자체가 문제라고 말한다. 《기생충》의 마지막 장면에서, 송강호는 사람을 찌른다. 그런데 그 자체가 비극이 된다. 정작 찔러야 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었으니까.
넷플릭스 화제작 《참교육》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주인공은 시스템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교권보호국이라는 ‘공적’ 권한을 업고 시스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간다. 《모범택시》가 "시스템은 끝났다"고, 《기생충》이 "시스템이 문제다"라고 말한다면, 《참교육》은 "시스템은 망가졌지만 아직 고칠 수 있다"고 말한다. 세 작품이 이렇게 다르다.
지금 사람들은 《참교육》에 열광한다. 왜일까. 우리는 이 이야기를 최근에 실제로 겪었다. 2023년 여름,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 몇 달간 검은 옷을 입은 교사 수만 명이 주말마다 거리로 나왔다. 한 추모 집회의 구호는 "우리는 그동안 너무 잘 참았다"였다. 가을에 교권 회복 4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런데 경찰은 그 죽음에 "범죄 혐의점이 없다"며 사건을 덮었고, 한 교사 단체는 "피해자는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게 핵심이다. 현실에는 때릴 빌런이 없었다. 진상 학부모도, 무책임한 관리자도, 누구 하나 법적으로 ‘책임’지지 않았다. 분노는 거대했는데 갈 곳이 없었다. 《참교육》은 바로 그 자리에 빌런의 얼굴을 그려 넣는다. 진상 학부모, 폭력 학생, 위선적인 정치인, 책임 회피하는 관리자. 그리고 현실엔 없던 교권보호국을 만들어 그들을 하나씩 응징한다. 현실이 끝내 주지 못한 결말을 픽션이 대신 준 것이다.
사람들이 원한 건 혁명이 아니었다. 학교를 갈아엎자는 게 아니라, 학교가 원래 하기로 한 일을 제대로 하라는 거였다. 혁명까진 지쳤고, 다 엎자니 무섭고, 참자니 화가 한다. 그래서 남는 소원은 가장 온건한 것 하나다. 원래 굴러갔어야 할 세상이 다시 굴러가는 것. 《참교육》의 정서가 무기력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에 가까운 이유다.
그런데 시스템은 얼굴이 없어서 화면에 담기지 않는다. '내사 종결'이라는 네 글자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를 어떻게 통쾌하게 때리겠는가. 못 한다. 《기생충》은 그 형체 없는 빌런을 정직하게 그렸고, 그래서 명작이 됐지만 사이다는 아니었다. 《참교육》은 반대로, 형체 없는 것을 기어이 얼굴로 바꿔 때린다. 그 전환이 이걸 소수의 수작이 아니라 다수의 현상으로 만든다.
흥행작은 늘 그 시대의 거울이다. 군부가 적이던 시절엔 군부를 패는 영화가 떴고, 재벌이 미운 시절엔 재벌 3세가 맞았다. 그러니 지금 《참교육》이 떴다는 건,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를 사는지를 그대로 비춘다. 책임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시대. 그리고 과거처럼 딱 짚어 때릴 적이 없는 시대. 《안티프래질》의 저자 나심 탈레브는 "행동에 책임을 지지 않는 자들이 리더가 되는 사회야말로 가장 취약한 사회"라고 경고한 바 있다.
과거보다 훨씬 어려운 이유다. 옛날 영웅은 적을 받아 들고 때리기만 하면 됐다. 적의 이름은 이미 정해져 있었으니까. 지금은 다르다. 우리는 적의 얼굴을 직접 그려야 하고, 그리고 나서 그걸 또 풀어야 한다. 문제를 정의하는 일과 푸는 일을 동시에 떠안은 것이다. 《참교육》이 주는 쾌감은 사실 그 첫 단계를 대신 해준 데서 온다. 우리 대신 적의 얼굴을 그려주고, 우리 대신 때려준다. 두 시간 동안은 시원하다. 그런데 극장을 나오면 현실의 얼굴 없는 빌런은 그대로 거기 있다.
어쩌면 이 시대의 진짜 빌런은, 적을 안 보이게 만든 그 무언가다. 누가 책임자인지 흐리고, 분노의 과녁을 지우고, 모두를 화나게 하되 누구도 패지 못하게 만드는 것. 《참교육》은 그 빌런에게 잠깐 얼굴을 빌려준 이야기다. 우리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은, 빌린 얼굴이 아니라 그 진짜 빌런의 얼굴을 우리 손으로 그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려야만 한다. 우리의 적을 우리 주변에서. 어쩌면 내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