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인간 사회는 결정 위에서 굴러간다. 무엇을 지을지, 누구를 믿을지, 어디에 돈을 쓸지, 무엇이 위험한지. 매 순간 누군가는 결정을 내려야 하고, 결정의 질이 그 사회의 운명을 만든다. 사회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에게 힘과 권력을 위임한다.
좋은 결정은 좋은 맥락이라는 '자산'을 가진 사람이 내릴 수 있다. 맥락이란 흩어진 정보들의 합이다. 단순히 정보를 많이 가진 게 아니라, 정보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를 머릿속에 그려놓은 그림. 이 자산을 가진 사람이 좋은 결정을 내리고, 그래서 권력을 위임받는다.
이 맥락이라는 자산을 만드는 일이 예전에는 굉장히 어려웠다. 시간이 걸렸고, 경험이 쌓여야 했고, 그 모든 걸 머릿속에서 하나로 꿰는 데 또 시간이 걸렸다. 한 분야의 맥락을 갖는 데 십 년, 여러 분야를 꿰뚫는 맥락을 갖는 데 평생이 걸렸다.
그러니까 맥락을 가진 사람이 적었다. 그 적은 사람들이 결정을 내렸다. 의사가 환자의 결정을, 변호사가 의뢰인의 결정을, 교수가 학생의 결정을, 컨설턴트가 회사의 결정을 대신했다.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곧 권력을 가지는 사람이었다. 사회의 위계는 결국 누가 더 많은 맥락을 가졌느냐 위에 세워져 있었다. 지식은 자산이고, 권력이고, 계급이었다.
이제 그 전제가 깨진다. 십 년치 경험이 몇 시간으로 압축되고, 평생치 맥락이 한 번의 대화로 펼쳐진다. 맥락을 만드는 일이 더 이상 어렵지 않다. 그러면 맥락을 가진 사람이 누리던 모든 게 흔들릴 것 같다. 직업, 권위, 수입, 지위. 지식 위에 세워진 모든 구조가 다시 정의될 것 같다.
세대 간의 거리도 좁혀진다. 예전에는 어린 세대가 윗세대를 따라잡으려면 그들이 평생 쌓은 맥락을 시간을 들여 따라 쌓아야 했다. 그게 위계의 근거였다. 이제 그 평생치 맥락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어린 세대가 윗세대를 따라잡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압축된다. 경험의 양으로 만들어졌던 권위는 더 이상 권위가 아니다. 오히려 새 도구를 먼저, 더 깊이 다루는 어린 세대가 앞서 나가는 일이 흔해진다.
기득권의 자리도 흔들린다. 과거 방식으로 자산을 쌓은 사람들(학벌, 자격, 경력, 인맥, 축적된 지식)의 해자는 결국 맥락의 희소성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그 희소성이 사라지면 해자도 사라진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새 도구를 먼저 잡은 사람들이 메운다. 과거에 자산을 쌓을 시간이 없었던 사람, 기존 시스템 안에서 자리를 못 잡았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길이 열린다. 게임이 리셋되는 순간 가장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 다음 판의 주인공이 된다.
인사이트의 정의도 바뀐다. 예전에 인사이트란 흩어진 점들을 연결해서 남이 못 본 그림을 보는 일이었다. 그 연결이 어려웠으니까 가치가 있었다.
이제 연결은 컴퓨터가 한다. 그럼 뭘 연결시켜야 하나? 어떤 맥락과 어떤 맥락을 연결시키게 시켜야 하나? 무엇을 연결하라고 시킬지 정하는 판단, 그리고 결과물 중 무엇이 진짜인지 가르는 판단. 인사이트는 연결 자체가 아니라 연결을 둘러싼 판단이 된다.
(뻔한 말이지만) 이제는 차이를 만드는 건 질문의 퀄리티다. 그런데 좋은 질문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아는 게 많아야 질문이 날카로워지고, 자기가 사는 세상 바깥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본 적 있어야 바깥을 향한 질문이 나온다. 같은 길을 같은 방식으로 걸으면서 남이 못 던지는 질문을 던질 방법은 없다. 결국 어떻게 사는지 자체가 질문의 재료가 되고, 질문의 재료가 그 사람의 경쟁력이 된다.
살아가는 방식이 많이 바뀌었다. 질문하고, 답을 받고, 그 답으로 다시 질문을 만들고, 또 답을 받는다. 이 사이클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고, 훨씬 빨라졌다. 하루에 몇 번 돌리느냐가 한 달 뒤의 거리를 만든다.
요즘은 무언가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많이 보인다. 내 주변 환경이 바뀐 게 아니라, 그냥 뭔가 만드는 사람들이 많아진 게 사실인 것 같다. 결과물을 세상 밖에 계속 내보내는 사람들에게 어텐션이 쌓이고 있는 게 보인다. 쉬핑해야 닿고, 닿아야 어텐션이 쌓이고, 어텐션이 쌓여야 자산이 된다. 이게 진짜 자산이 된다.
정보 접하는 방식, 일하는 방식, 사고하는 방식이 몇 달 사이에 다 바뀌었다. 이게 그냥 도구가 편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다. 무엇이 가치를 가지는지, 누가 앞서가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게임의 규칙이 다시 쓰이는 중인 것 같다.
이 한가운데서 자꾸 드는 질문이 하나 있다. 나는 지금 이 흐름을 잘 타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떠밀려가고 있는 걸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새벽 1:10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