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트
야구할 때, 다 필요하다. 홈런 치는 사람도 필요하고, 안타 치는 사람도 필요하고, 2루타도 필요하고, 때로는 도루하고 번트 칠 줄도 알아야 된다.
근데 사업은 다들 홈런만 쳐야 된다고 생각한다. 시작해서 초기 투자 받고, 몇 년 하다 더 큰 투자 받고, 또 받고, 그렇게 다 유니콘이 돼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회사는 어차피 소수다. 유니콘이 되려면 전 국민한테 영향을 줘야 되고, 그러면 인프라 레벨이 돼야 된다. 혹은 특정 섹터에서 명확한 1등, 누구나 지속적으로 쓰는 기반 서비스 정도는 돼야 된다. 근데 인프라라는 건 애초에 여러 개가 필요하지 않다. 그 자리는 기존 거대 기업이 전환해서 차지할 수도 있다. 자리 자체가 몇 개 없다. 유니콘은 소수일 수밖에 없다.
근데 창업 공급은 계속 늘어난다. 모두가 창업을 하라고 권하는 시대. 그러면서 동시에 모두에게 홈런 4번 타자가 되라고 한다. 전원이 홈런 스윙을 하는 리그가 된 거다. 야구에서 전원이 풀스윙을 하면 뭐가 늘어나는지는 정해져 있다. 삼진이다. 유니콘 강박이 양산하는 건 유니콘일 수가 없다. 폐업이다.
그럼 누가 풀스윙을 시키나. 이 강박에는 이해관계자가 있다. 펀드는 홈런 하나가 펀드 전체를 먹여 살리는 구조다. 그러니 "다음 라운드 가야지"라고 등을 민다. 창업자는 남의 스코어보드로 야구를 하게 된다. 어떤 투자사가 포트폴리오 회사들을 모아 디너를 했는데, 투자받은 금액에 따라 테이블을 쪼갰다는 얘기를 있다. 테이블 배치가 곧 펀드 수익 기여도 서열이다. ㅎㅎ
홈런은 노린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좋은 스윙을 오래 반복한 결과로 나온다. 유니콘도 결과다. 결과를 목표로 세우는 순간 스윙이 망가진다. 홈런 타자가 있는 반면에 번트 치는 타자도 있어야 한다.
중간에 적당히 잘 됐을 때 번트 치듯이 몇십억, 몇백억에 매각하는 사례가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출루다. 개인 입장에선 그 돈으로 충분히 행복한 삶을 누린다. 부트스트래핑도 있다. 투자 안 받고 혼자 천천히 오래 끌고 가는 사업도 있다. 인프라급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줄 수 있다.
한국은 언제나 줄세우기를 좋아한다. 누구 창업이 더 좋다 나쁘다, 누구 카테고리가 더 크다 작다. 경쟁하면서 교육받았으니 창업도 경쟁으로 한다. 피터 틸이 말했듯 창업은 애초에 독점하는 거다. 창업 자체가 경쟁이 되면 그 자체로 의미가 없어진다. 남의 스코어보드는 치워야 한다. 자기 야구를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