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

• K리그는 박지성을 지명하지 않았다. 수원은 입단 테스트에서 그를 떨어뜨렸다. 몸이 약해서 크게 못 클 거라고 봤다. 키도, 힘도, 스피드도 또래 중에 특별하지 않았다. 재능이 화려한 선수가 아니었다. 측정 가능한 것만 놓고 보면 틀린 판단도 아니었다.
• 수원에서 떨어진 뒤 그는 명지대에 갔다. 열심히 노력해 올림픽 대표에 뽑혔다. 일본 두 팀이 그를 데려가려 했다. 상위권 클럽 시미즈는 '대학생 조건부' 계약을, 하위권 교토 퍼플 상가는 정식 프로 계약과 주전급 대우를 제시했다. 그는 더 높은 순위 대신, 자기를 진짜 선수로 대해준 약팀을 골랐다. 당시 구단주는 이나모리 가즈오였다. 교세라를 세운, 일본이 '경영의 신'이라 부르는 그 사람이 맞다.
•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다. 2000년 6월, 시즌 중간에 합류한 그는 한동안 벤치에 있었다. 그 사이 교토는 리그 15위로 2부에 강등됐다. 약팀을 골랐더니 그 약팀이 더 내려간 것이다. 보통은 여기서 떠난다. 그는 남았다.
• 2부에서 그는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미드필더로 거의 모든 경기를 뛰며 팀의 1부 복귀를 끌어냈다. 1년 만의 승격이었다. 1부로 올라온 뒤에는 윙어로 자리를 옮겨, 마쓰이 다이스케, 쿠로베 테루아키와 함께 공격의 한 축을 맡았다. 우라와 원정에서는 1골 2도움으로 팀의 3-1 승리를 혼자 설계했다. 한국 대표팀에 차출돼도 그는 가능한 한 팀에 남았다. 가장 약했을 때 받아준 곳을 그렇게 갚았다. 그는 멋진 팀 가는 사람 아니라, 자기가 속한 팀 멋지게 하는 사람이었다.
• 2002년이 그 모든 것이 모인 해였다. 월드컵에서 그는 포르투갈을 무너뜨린 골로 4강 신화의 한가운데 섰고, 교토는 시즌 종합 5위로 구단 최전성기를 맞았다. 그해 말 J리그가 뽑은 '올해의 우수선수' 35명 중 한국 선수도, 교토 선수도 그 하나뿐이었다. 박지성은 3년 만에 그 팀의 얼굴이 되어 있었다.
• 2003년 1월 1일, 천황배 결승. 그의 교토 계약은 전날인 12월 31일자로 이미 끝나 있었다. 히딩크와 PSV행도 정해져 있었다. 나갈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경기였다. 돈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무보수로 그라운드에 섰다. 0-1로 지던 후반, 동점 헤딩골을 넣었다. 이어 그의 패스가 결승골로 이어졌다. 팀은 2-1로 이겼다. 교토 구단 역사상 처음이자, 지금까지도 유일한 메이저 우승컵이었다. 떠나는 선수가 떠나는 팀에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구단은 줄 필요 없다던 출전 수당에 우승 보너스까지 얹어 그에게 건넸다.
• 유럽으로 떠나기 직전, 이나모리는 박지성과 그의 가족을 불러 밥을 먹었다. 그 자리에서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디로 가든 응원하겠네. 절름발이가 되어 돌아와도 반드시 받아주겠네." 자기를 진짜 선수로 받아준 팀에, 그는 받은 것을 돌려주고 떠났다. 그리고 그 팀은 떠나는 그에게 다시 자리를 약속했다.
• 물론 인성이 곧 성공이라고 말하면 과장이다. 재능도 있었고, 월드컵 4강과 히딩크라는 운도 컸다. 겸손하고 헌신적인 선수가 다 월드클래스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통제할 수 있었던 건 재능도 운도 아니었다. 자기를 받아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것뿐이었다. 갈림길마다 문이 닫히지 않고 열려 있었던 건 그 반응 덕이다.
• 사람들은 계속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어 했다. 인성은 성공의 원인이라기보다, 기회를 성공으로 바뀌게 둔 토양에 가깝다.
• 20년이 지나 그가 교토를 다시 찾았을 때, 클럽 시설은 예전 그대로였다. 그의 옛 응원가가 경기장에 울렸다. 사람들은 그걸 20년이 지나서도 노래로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