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틸이 자주 이야기 하는 책. 《주권 개인(The Sovereign Individual)》, 핵심 주장은 단순하다. 국가는 신성한 공동체가 아니라, 보호와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세금을 걷는 하나의 사업체(business)에 가깝다는 것. 그리고 정보화 시대에는 자본과 인재의 이동 비용이 급격히 낮아지면서, 국가는 더 이상 독점 사업자가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 경쟁해서 자본과 인재를 유치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는 것이다.

김용범 “AI시대 과실, ‘국민배당금’으로 국민에 환원돼야”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임형섭 기자 =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12일 ”인공지능(AI) 인프라 시대의 과실은 특정 기업만이 끌어낸 결과가 아니다”라…

최근 김용범 정책실장의 반도체 성과공시 발표 이후 주가가 급락했다는 소식. "나라가 어떻게 되는 건가" 하는 반응들이 나오는데, 그런 반응의 기저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다. 정부와 기업이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고, 인센티브가 얼라인 되어 있다고 가정하는 것. 다시 생각해 볼 만한 지점이라고 본다. 기본적으로 정부도 하나의 이익집단이고, 기업도 하나의 이익집단이다. 이 둘의 인센티브는 '다를' 수 있다.

정부는 인프라를 깔고, 국민 세금과 기업 세금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실현하고 싶은 이익을 실현한다. 그리고 정부에게는 군수권 같은 것이 무기로 존재한다. 강제력의 영역. 기업은 다르다. 한 국가에만 존재할 수도 있지만, 다국적 기업이 된 이상 여러 국가와 이해관계로 얽힌다. 군수권 같은 무기는 없다. 대신 어디에 더 힘을 쏟을지, 어디에서 세금을 적게 낼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이동성이라는 무기. 서로 가진 무기가 다른 두 집단이라고 봐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 둘은 더 이상 위계 관계가 아니다. 과거처럼 기업이 국가 아래에 종속되어 있다는 그림은 잘 맞지 않는다. 서로 다른 조직,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두 집단이 균형을 잡으며 함께 굴러가는 그림에 더 가깝다.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 서로가 없으면 안 되지만, 서로 내 맘대로 할 수도 없는 사이.

​그렇게 보면 정부의 정책 발표에 대한 시장의 반응도, 기업의 의사결정에 대한 정부의 반응도, 모두 이 협상 테이블 위의 한 수다. "우리가 서비스를 더 하고 있으니 세금을 더 내라"는 입장과, "그러면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다"는 입장이 부딪치는 것.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이념의 문제 이전에, 두 이익집단의 협상이라는 층위가 있다.

​가까운 예가 삼성전자의 텍사스 테일러 공장이다. 한국에서 일어날 수도 있었던 수십조 원 규모의 투자가 미국으로 가서, 미국 연방정부의 칩스법 보조금 6.9조 원과 텍사스 주정부 보조금 7천억 원을 받고 자리를 잡았다. 기업이 가진 이동성이라는 카드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그림이다. 동시에 미국이라는 국가가 보조금이라는 카드로 그 이동성을 끌어당기는 그림이기도 하다. 삼성도 한국에서 플레이하는 것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고 판단되면, 자기 자산을 돌려 더 잘 서빙받을 수 있는 국가로 옮겨 갈 수도 있다. 주주자본주의 시대에 투자자 입장이라면, 오히려 그 결정을 지지하고 한국으로부터의 엑소더스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하나의 선택일 수 있다.

국가와 기업의 인센티브는 다를 수 있다는 것.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고 가정하는 것이 오히려 '예외'적인 상황일지도 모른다. 둘의 관계는 한 번에 결판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는 협상의 과정이라는 것. 그 과정에서 균형은 천천히 찾아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정부의 잘못된 결정은 자본 이탈로 보정되고, 기업의 과한 요구는 여론과 정책으로 다시 조정된다. 데이비슨과 리스-모그가 그렸던 풍경, 자본과 인재의 이동성이 국가의 협상력을 시험하는 풍경.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험이 이미 시작된 듯하다.